세대차이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나이가 들어야만 느낄 수 있고 이해되는 일들이 가끔씩 있다. “라떼는 말이야” 이야기를 듣더라도 지나가 봐야만 알 수 있는 느낌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일상생활과 사회활동을 하면서 시대적 변화에 대하여 깜짝 깜짝 놀랄 만큼 세대차이를 느낄 때가 있다.
필자는 임업인으로 세대차이에 대한 사례로 우리나라 산림녹화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지독히도 가난했던 과거 50년 전 황폐한 국토에 나무를 심기 시작한 시기를 기억한다. 부모님 대신 부역(의무 할당)으로 고사리 손으로 산에 가서 나무를 심었다. 그때 당시의 우리나라 산림은 황폐화 되어 토질이 척박해져 있었고 아궁이에 땔나무가 필요했던 시절이라 감히 부가가치가 높은 좋은 용재로 수확할 수 있는 수종을 심을 환경이 아니었다.
나무를 심는 목적이 빠른 산지피복으로 토사유출을 방지하고 움(맹아)이 잘 나오는 수종, 척박한 토양에서도 잘 자랄 수 있는 아카시아, 싸리나무, 오리나무 등을 주 수종으로 많이 심었으며 철저한 관리로 50여년이 지난 지금 세계적으로 성공적인 녹화 성공의 모범 사례를 보여 주었다.
하지만 현재 이 시대에서는 쓸모 있는 나무가 없다, 왜 이런 나무들을 심어서 부가가치가 없는 산림으로 만들었느냐고 임업인들을 원망하는 이야기들을 듣곤 한다. 이런 분들은 지나간 그때의 환경을 모르기 때문이다.
베이비붐세대의 유년기 시절에는 교육 수준과, 경제적 여건이 좋지 않던 환경이었으며, 더욱이 대부분 가부장적인 부친으로부터 가정교육을 몸으로 익힌 탓에 그러한 상황들이 부모의 권리 인양 당연하게 받아들였고 그런 부모님을 원망해보지 않고 살아왔다.
부모님은 나를 낳아서 키워준 절대적인 은인이었기에 감히 원망을 하거나 항의를 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은 부모님의 교육 가치관과 다른 더 좋은 나만의 자식교육을 갈망했고 또 나름 옳다는 판단으로 자식들을 대했던 것 같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사회활동(돈벌이)에 얽매이면서 여유 없는 시간의 핑계로 자식들의 마음에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고, 시대가 변했음에도 내가 부모님께 받았던 가부장적인 모습들이 고스란히 아들들에게 그대로 전달되었던 것 같다. 어떤 부모라도 부모로서 처음 겪는 경험과 능력 부족으로 잘못된 판단을 할 수 있었을망정, 알면서 자식에게 잘못된 길을 가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세대차이의 갈등은 부모 자신들의 잘못된 판단에 대한 현재 세대 자식들의 생각이 다르고 그 다름의 결과에 대하여 서로 이해하지 못하고 인정하지 않은 부분이 계속 갈등을 키우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우리 자식들 역시 부모님들의 시대적 환경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상태로, 부모로부터 자유를 구속 받았던 오랜 시간들이 누적되어 불만이 생기게 되고 현재 시대의 환경을 이해하지 못하는 부모님을 원망하는 세대차이의 갈등이 생기게 된다.
사소한 일들에 대하여 의견 충돌이 있기도 하고 마음 상하기도 한다. 부모와 자식이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친구는 아니더라도 편하게 대화할 수 있는 관계 정도만 되어도 성공한 관계가 아닐까 싶다. 왜냐 하면 아무리 노력해도 각자가 살아온 시대적 환경은 자신이 직접 격어보지 않고는 마음으로 이해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세대차이를 극복하다기보다 줄일 수 있는 방법은 서로 상대의 입장에서 이해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부모는 과거가 아닌 지금의 사회구조와 자식들 또래의 젊은 사회구성원들에게 보편적인 생각과 미래 비전에 대한 이야기들을 들어보는 기회를 만들고 왜 그런지 이해하기 위해서 노력하여야 하며, 자식들도 조금은 부모님 세대에 대한 배려가 필요한 게 아닌가 싶다.
어차피 우리 아들들 역시 부모님들의 부정적 생각을 탈피한다고 노력하겠지만 부모의 유전인자를 물려받았고 또한 미래 세대에 대한 완벽한 이해와 예측 대응은 어려워 자신들 역시 또 아들들에게 세대차이의 갈등이 유발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을 것이다
냉정하게 생각하고 실천해야 한다. 우리 아들들의 이 시대는 먹고사는 걱정이 없는 물질적 풍요로 자긍심 고취에 치우침이 있다. 이러다 보니 부모와의 세대 갈등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배고픔을 극복하기 위해 인간의 존엄성보다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살아온 베이비붐세대의 역할은 여기까지인 듯하다. 우리 아들들은 아버지가 된 먼 훗날 자신들이 이 세상에 무엇을 남겼다고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지 고민을 해봐야 할 것이다.